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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사회 조성이 한국의 해법

[조선일보 칼럼, 2015.2.16, A30] '신뢰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해법이다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기고

  "급팽창하는 중국을 비롯한 4대 강국에 둘러싸인 현실 타개할 가장 훌륭한 무기는 한국 사회에 禮儀와 正直이 굳건하다는 믿음을 심는 것 : 국제관계, 우리 하기에 달려"

  "천하에 가련한 멕시코여,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지척에는 미국이 있으니." 멕시코 사람 누구나 외고 있는 잠언이자 역사다. 강대국을 이웃에 둔 작은 나라의 통한이 절절하게 서린 구절이다. 연전에 그 나라 출신 외교관에게 이 말을 했다가 된통 당했다. "그래, 사실이야, 그런데 한국은 멕시코보다 4배나 더 힘든 처지야. 어디 미국뿐인가. 일본과 중국이 도사리고 있어.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북한이 코를 대고 있잖아!" 새삼 정신이 번쩍했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냉혹한 운명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강자 대 약자, 1 대 1의 관계가 아닌 다자 관계이기에 틈새와 변수가 많다. 묘한 균형을 잘만 유지하면 실보다 득이 많을 수도 있다. 게다가 시대의 축복도 있다. 무력만으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던 시대가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국경이 유연해졌다. 자본과 물자의 이동도 용이해졌다. 사람들의 내왕도 마찬가지다. 4개의 힘든 이웃 나라 중 중국의 비중이 한껏 높아졌다. 앞으로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20세기 최대 이변의 하나로 중국의 침체를 들곤 했다. 그 덕에 우리는 중국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은근한 비교 우월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런 '호시절'은 이미 막을 내렸다. 우리 후세 앞에는 다시 중국이라는 거대한 산맥과 대양, 평원과 사막이 위세를 부리고 있다.

  3월 1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다. 예정된 일이라 모두가 나름대로 준비했을 것이다. 총체적 득실은 한참 지나고 봐야겠지만 세계적 추세는 거역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을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졌다. 추진하던 노 대통령이 농산물과 관련해 던진 한 대목을 기억한다. '일단 해보자. 미국과의 협정이 설령 잘못되더라도 중국과 치를 본고사에 대비한 예비 시험으로 치면 될 게 아닌가.'

  오래전부터 중국 '요우커'(遊客)들이 밀어닥치고 있다. 청와대 정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명동 상가와 여러 면세점을 휩쓴다. 성형 수술을 통해 '강남 스타일' 가락을 맞춘다. 제주도는 '푸이다이 (富一代), 중국 신세대 소비자의 선호지가 되었다. '바오젠 거리'는 이들의 로데오 거리라고 한다. 투자 이민 영주권자도 곧 탄생할 것이다. 좋은 일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과거사 갈등으로 한동안 주춤하던 중국인의 일본 나들이가 다시 궤도에 올랐다는 소식이다. 일본의 정치는 혐오스럽지만 상도의와 시민의식은 의심하지 않는다. 눈속임, 바가지요금이나 멸시의 시선도 없다. 자본에 대한 경의와 고객에 대한 친절이 체질화된 나라임이 분명하다. 일본에 비해 한국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다. 불편하고 비체계적이고 무엇보다도 정직하지 않다는 불평이 따른다. 그럴 법도 하다.

  정권은 이따금씩 바뀐다. 그래도 정책은 지속성을 유지한다. 정권의 성격이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정책의 90% 이상은 동일하다. 국민의 소비 일상과 여가 활동에는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는 우리 체제다. 나라 사이의 정치 기류도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주와 여가 활동은 정치를 초월한다. 돈을 벌고 싶은 욕구와 쓰는 행태는 어디서나 비슷하다. 셰익스피어의 명구가 있다. '돈이 최고의 군대다. 절대 패배를 모른다.' 세련된 소비 유혹에 주머니를 여는 것이 바로 삶의 질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 지역에 일본 상인이 투자해 청정 식품을 조달한다. 서양에서 포도주를 수입해 중국으로 재수출하는 우리 기업도 있다. 중국 소비자가 그 기업 브랜드에 보내는 신뢰가 밑천이다. 흔히 중국의 고질로 지적되는 '관시(關系)' 문화의 본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신뢰일 것이다. 한때 바람처럼 중국에 진출했던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악화된 기업 여건 못지않게 단기 성과에 집착한 경영 철학도 패인의 하나였다.

  그 멕시코 외교관 말대로라면 대한민국을 향해 검은 발톱을 세우고 있는 '4개의 악마', 이들을 순치시킬 무기는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 그 자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정직과 믿음이 국정과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는 절대로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온 나라가 청년 실업 문제로 고민한다. 수많은 직장이 중국, 그곳에 있다. 급격한 경제 발전은 시대에 앞선 욕망을 품게 만든다. 그 욕망의 전도사도, 후견인도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 낸 우리 청년 몫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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